덥썩 몸을 뒤흔들며 깨우는 탓에 의식이 급부상했다. 눈을 뜨자 불도 켜지 않은 어둑한 방 안과, 창백하게 질린 빌의 얼굴이 시신경 안으로 뛰어들었다.
저질렀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잠꼬대를 하는 것은 도무지 막을 방도가 없었다. 무의식이 제멋대로 뇌 속에 들은 것들을 헤집고 재생하는 걸 어떡하나?
딱히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빌 역시 종종 잠꼬대를 하곤 했다. '케이트'라든가 '벤'이라든가——몸이 기억하고 있는 전생체의 기억 탓에 선잠을 자다가도 신음을 내며 뒤척일 때가 있었다. 그정도로 의식 밑바닥까지 다녀온 날이면 언제나 금방 헉, 하며 몸을 일으키고는 밧줄에 짓이겨진 목덜미의 흉터를 더듬었다.
예전엔 그런 빌을 보며 무슨 연유인지도 짐작하기 힘들어했는데, 레코드판 덕분에 빌의 의식 밑바닥까지 엿보고 난 뒤로는 그저 측은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빌은 에이지 앞에서 깊게 잠드는 일이 많아졌다. 에이지에게는 그리운 악몽을 꾸는 빌의 손을 잡아주거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가 식은 땀을 흘리며 깨어나는 걸 지켜봐야하는 무력함은 비슷했지만, 잡은 손에 힘을 실으며 맞잡아오는 그 감각이 에이지의 노력을 충분히 가상하다 여겨주는 것 같아서 되려 위로를 받곤 했다.
지난 밤에 빌은 어땠을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자신이 뭐라 웅얼거렸을지 에이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잘못했어요'나 '아버지'나 '어머니' 중 하나거나 둘 이상이겠지. 어둠 속에서 빌의 얼굴을 보고 상황을 파악하고 나자, 다음으로 느껴진 건 제 눈가에 맺힌 눈물이었다. 아니에요, 이건 내 게 아니라……. 변명을 하려다 자기 몸에서 일어난 일을 부정하려니 꼴이 이상해져서 그만두었었다.
빌이 먼저 해프닝으로 취급하며 유야무야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도 어둠 속이라서 방심했던 건지 상처입은 얼굴을 다 숨기지는 못 했다. 자괴감이 들었다.
스스로의 유전 정보로부터 복제체를 만든 미친 과학자는 양심껏 '원본'의 기억을 지우고 자신을 세상에 풀어줬지만, 다른 미친 과학자(과학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교수'라는 이름을 댔으니 전문분야는 알 방법이 없지만, 성향은 둘다 비슷한 과니까)가 들쑤신 탓에 도로 전부 기억나버렸다.
무방비한 몰골로 세상에 뚝 떨어진 탓에 생긴 불안감은, '원본'의 기억이 눈을 뜨기 전의 공백기를 채워준 덕분에 많이 흐려졌다. 근원을 안다는 것은 존재의 윤곽을 짚게 해준다. 물러서 부스러질 것 같던 코가 에이지는 그때를 기점으로 제법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좋은 작용은 딱 거기까지였어.' 다만 에이지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자꾸만 노출되는 탐구심과 호기심이나 상처입은 10대 이방인, 20대 애향민의 자아는 에이지를 매번 한 박자 늦게 곤혹하게 만들었다. 척수반사적으로 나오는 행동들을 제어하기가 어려웠다.
그럴 때마다 빌이 불안해하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거기 있는 걸 확인하듯이 빌이 "에이지." 라며 이름을 부를 때마다는 가슴 한 쪽이 시큰거려왔다.
그러니까 할 수만 있다면 한번 더 지우고 싶어. 에이지는 기상하고서 줄곧 이 사태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정체성만으로도 버거울텐데, 그런 빌을 더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인맥을 더듬어서 솔라리스 신드롬을 가진 오버드를 찾자. 아니면 아예 카피해 오자. 솔라리스를 무슨 만능 신드롬 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약이 오른 에이지는 눈치채지 못 했다. 선입견으로 가타부타하는 게 빌을 닮아 있었다.
만능이 아니지. 솔라리스의 기억 소거는 화학 작용을 빌린 강한 최면이나 암시야.
역시 그렇겠지. 원리를 따지면 그게 맞겠지만…….
이미 기억 조작을 당해본 몸으론 훨씬 더 약한 암시를 받아서 금방 재차 떠올리거나, 있던 기억도 망각하고 심하면 해마와 그에 인접한 조직이 제 기능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 리스크가 훨씬 더 크니 무리한 시도는 삼가는 게 좋아.
……언제부터 '듣고' 있던 거야?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서. 내가 아는 분야라서 아는 척 좀 해보고 싶었지. 원인을 제공한 입장에서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너무 신경쓰지말고 지금의 삶에 충실해보는 게——
이래서 지우고 싶었던 거란 말이야. 말 걸 때마다 눈 뒤쪽이 지끈거리는 것도 원격으로 자아가 침범당하는 것도 원하지 않아.
특수한 사례이기는 하지. 그래도 꼭 말하고 싶은 게 있었어. 들어주라.
…….
내 곁에도 비슷한 고민을 하던 사람이 있었어. 잊으려면 잊을 수 있는 기억이었는데, 메모리다이빙까지 받으면서 정면으로 부딫히더라고. 지금 여기 있는 건 그런 자취들 덕분이니까 고마워하기로 했다면서. 용감하기도 하지.
'넌 혼자가 아니야' 같은 말을 하려고?
잘 알고 있네. 역시 '나'구나.
그러지 않아도 난 충분히 혼자가 아니야.
그래, 아빠가 미안하다.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
에이지는 벌컥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빌이 사무실에 없던 게 다행이었다. 덕분에 마음껏 씩씩거리며 발치에 있던 작은 휴지통을 발로 차버렸다. 퉁, 소리를 내며 휴지나 비닐이나 꽁초들이 쏟아졌다. 주워담는 건 당연히 에이지 몫이었다.
휴지통이 다시 원상복구되었을 즈음에는 솔라리스 신드롬으로 편해지려는 생각도 완전히 지워지고 말았다.
"신야 선생님, 코피 나셨어요."
"아, 깜빡했네요."
신야 쥰은 뒤늦게 입가까지 내려온 피를 손으로 훑어 확인하고는, 책상 위의 티슈를 몇 장 뽑아서 갖다 대었다. 코를 꾹 눌러 지혈해도 좀처럼 멎지 않자 그냥 티슈를 돌돌 말아서 코에 쑤셔넣었다. 그러고는 흥얼거리면서 마저 키보드를 두들겼다.